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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숭동 문화공간

위 치 서울 종로구 동숭동 1-75
구 분 신축
용 도 단독주택  제1종 근린생활 시설  문화 및 집회시설 
대지면적 777.49 m2 지상층수 6
건축면적 414.5 m2 지하층수 4
건폐율 53.3 % 구조 철근콘크리트조
연면적 3834 m2 용적율 212.70 %
외부마감 외벽: 노출콘크리트 바닥: 콩자갈, 석재 내부마감 천장: 노출콘크리트, 아크릴페인트 벽: 노출콘크리트, 시멘트블럭 바닥: 투명우레탄
작품설명 ‘문화공간’ 건축의 PROCEDURE 건축을 예술의 일개 장르로 간주치 못하게 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그 작업의 과정 Procedure 에 있다. 미적 반영을 통한 창작을 전제로 한다는 속성으로 간혹 예술의 지위를 부여 받곤 하는 건축의 작업과정은, 보통, 밀실에서 개인적으로 또한 임의에 의해 작업되어 지는 일반 예술들과는 너무 다르다. 공개되어 지지 않으면-설혹 공개되었다고 하드라도- 파기하고 나면 작업여부 조차 알지 못하는, 그렇다고 해서 그 예술의 완성을 부인할 수도 없는 예술과는 달리, 건축은 그 작업과정에 많은 사람들이 관여하게 되는 집단의 일이며 또한 여러 절차를 거치며 검증된 후에 실행되는 일이다. 또한 그 결과는 반드시 공개될 수 밖에 없고, 공개된 그 건축은 크든 작든 사회적 책임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건축은 임의에 의해 작업되어 지지 않는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사적이든 공적이든 반드시 건축주가 있어서 그가 모티베이션을 만들고 그로부터 건축행위가 발생한다. 따라서 건축가의 건축의지는 건축주로 부터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좋은 건축은 물론 좋은 건축가가 만들지만 좋은 건축가는 좋은 건축주가 만든다. 또한 집단의 도움없이 실행될 수 없는 건축이고 보면 그 집단의 능력에 의해서 건축가의 건축의지는 시시때때로 상처 받을 수 있다. 심각할 정도의 미개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우리의 건축 엔지니어링의 문제는 우리네 건축가들 앞에 놓인 답답한 장벽이다. 건축가의 교육과 양성도 중요하지만 올바른 건축엔지니어 양성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건축 법규와 관련된 각종 건축 행정 절차는 차라리 희극이다. 간혹 참 이해하기 힘든 심의위원회의 결정이나 전가의 보도를 든 건축 공무원 앞에 선 건축의지는 센티멘탈일 뿐이고 건축가의 가련한 낭만이기 일 수이다. 이미 장인정신이라는 말이 고어가 된지 오래된 우리네 건설현장은, 일확천금을 노리는 주변 민원인들에 의해 혼이 나갔는지 그 흔한 ‘혼을 담은 시공’은 여지 없이 건축가의 그나마 남은 건축의지를 무참한 비극적 운명으로 끝나게 한다. 물론 이 모든 과정들의 일차적 책임은 건축가에게 있다. 모든 절차를 조정Coordinayion해야 하는 것이 그의 의무였으며 그것이 불가능 해졌을 때에는 그 일들과 분명한 선을 그을 수 있어야 했을 터이다. 그렇다. 모든 비난을 그는 면할 도리가 없으며 이런 저런 변명으로 그가 저지른 실수는 면책되어 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하므로 그런 험한 과정을 통해 세워진 그의 건축이 만약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는 이에게 감동을 줄 수가 있다면, 그리고 형해形骸 만 남은 그의 건축의지가 조금이라도 읽혀질 수 있고 남겨 질 수 있다면, 그런 건축은 가치의 차원을 넘게 된다. 또한 그런 의미에서 건축은 일반 다른 예술이 줄 수 있는 감동의 가치보다 절하되어 평가될 수 없다. 동숭동 1 번지 동숭동 1 번지는 과거 서울대학교 문리대의 번지수이다. 70년대 중반 문리대의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이전이 완료된 후 정부는, 이 동숭동 1 번지를 대략 100평 단위의 주택지로 100 필지 남짓 분할하여 일반에게 분양하였다. 산의 모양이 낙타의 등 처럼 생겼다 하여 조선시대에 낙타산駱駝山으로 불리웠던 낙산 아래에 터를 잡았던 이 자리는, 원래 북촌마을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 주거지로 동촌이라는 지명을 가졌었으며 성균관 때문에 생긴 숭교방崇敎坊의 동쪽이라 하여 동숭동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근래의 일이다. 따라서 학교로 용도 변경하여 사용되던 땅에 다시 주거지로 그 기능을 회복시키는 일이 서울의 역사성에 비추어 바람직한 일일 수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이 땅은 그런데 별 관심이 없는 이들에 의하여, 상품으로서의 반듯한 100개의 필지확보가 우선이 된, 희한한 단지의 모양으로 획지되었고, 이내 70년대 후반 고급 주택들이 경쟁하듯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마로니에 광장에 면한 3개 필지를 소유하였던 김수근 선생이 그 땅을 문예진흥원에 넘겨 주어 지금의 미술회관을 짓게 되면서 이 동숭동 1 번지의 운명은 문화예술의 지역으로 다시 바뀌게 된다. 그 이후 건립된 공연장은 기존의 미술회관과 함께 서울의 문화지도를 바꾸면서 상당한 흡인력을 가지고 크고 작은 규모의 화랑과 소극장들을 불러 모으게 되었다. 급기야 서울시에서는 도시설계 등을 통하여 이들의 시설을 장려하고 새로운 문화축을 형성시키면서 서울에서도 가장 활력이 넘치는 문화의 거리로서 대학로가 등장하게 되었다. 어찌 현대 한국의 천민자본이 이 기회를 놓칠 수 있을 것인가. 지가가 10년 사이에100 배로 수직 상승하면서 이미 주택지의 기능을 상실한 이 곳은 기존의 주택들이 하나씩 차례로 허물려 지면서 4.5층 규모의 상업건축들이 들어 차게 된다. 비싼 땅 값을 치른 이들 상업건축은 당연히도 법규가 허용하는 한 최대의 볼륨의 확보가 절실하며 최대의 선정적 모습으로 유객하여 그들의 수지를 맞추어야 한다. 이런 곳에 쉽게 유인되는 행인이 화랑이나 책방 같은 골치 아픈 곳을 찾을 리 없다. 이런 곳에서 배겨날 수 없던 그들은 드디어 더욱 싸고 건강한 땅으로 떠나고 그 자리에는 선정적 포르노를 공연하는 극장이 차지하거나 비싼 찻집으로 둔갑하여 자극적 모습으로 아우성치며 호객 한다. 똑 같은 건물이 하루 아침에 멕시코 풍으로 라스베가스의 모습으로 또는 달나라 모습으로 변하는 이 곳의 논리는 재생산 없는 소비이며 욕망이지 이미 우리가 이해하는 문화가 아니다. 또한 이 곳에서의 건축은 상징과 기호의 자본주의 세력 앞에 별 볼일 없을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곳은 여전히 활력이 넘친다. 날 좋은 때는, 아침 나절 이 곳의 인형극장을 찾아 오는 어린아이들의 노란빛 물결이 좁은 길을 가득 메우며 재잘거리는 모습을 보는 것이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니며, 점심에는 엊 저녁 마신 술로 쓰린 속을 풀며 인사를 나누는 연극인, 공연자들의 모습에서도 살아 있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저녁 무렵 모여 드는 젊은이들의 얼굴들은 그들의 고뇌가 무엇이든 활기에 차 있다. ‘문화공간’ 보통명사인 문화공간을, 이 건축을 통해 하게 되는 문화사업을 위한 회사의 이름으로 쓰고 이 건물의 이름으로도 쓰기를 원한 건축주는 이 인근 지역에 오랫동안 거주하여 이 곳에 깊은 애착을 가진 중견 기업인이다. 그는 또한 6,70년대에 걸쳐 이곳 문리대에서 수학하였으니 이곳 땅에 대한 생각이 외지에서 몰려와 판을 벌리는 입장과는 사뭇 다를 것이었다. 이 건축을 위한 땅은 모 재벌이 소유하고 있다 하는 이 지역 최대의 단일 필지인 700평 규모의 사설 주차장 동쪽 건너편에 위치하여 있다. 이 주차장의 공간적 의미가 이 지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어마 어마 하다. 볼 쌍 사나운 물골의 건물이 아우성을 치고 있는 거리의 풍경을 그래도 견디게 하는 장치가 아마도 이 주차장의 공간감이 갖는 소화력에 기인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미 오픈 스페이스로 인식된 이 곳이, 되도록 개발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너무 감상적일 것이다. 그러나 개발되더라도 이러한 공간적 여과장치가 어느 정도 유지될 수 있는 방법이 강구되어 지기를 바란다. 동숭동 1-100과 1-100의 두 필지를 통합한 200평 크기의 대지는 동서 양편에 각각 6m 도로에 걸쳐 있었다. 가뜩이나 단지계획의불합리로 안쪽 순환도로와 바깥쪽 순환도로와 연결하기가 쉽지 않은 지역이라, 이 지역간 소통을 위해서도 또한 보행인을 이 건축의 내부로 쉽게 유도하기 위해서도 두 길을 연결하는 사잇길을 건물 내부에 설정하는 일은 긴요한 것이다. 비록 1.8m 폭의 크지 않은 통로지만 이 땅이 속한 100m 길이의 블록을 관통케 하는 밀도 있고 사연 있는 골목길이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수직 연결을 위하여 ‘이문 291’에서 사용하였던 펼쳐진 계단을 좀더 적극적으로 적용하고 이 경사진 길에 면한 입면을 투명하게 하여 이 수직의 길을 오르내리는 풍경이 바깥에서 뿐 아니라 안에서도 보일 수 있게 하였다. 이 길을 지탱하는 벽체는 인접된 건물과의 실질적 연결을 가능케 하는 장치이며 바깥의 풍경을 끌어 당기는 창이다. 이로써 건축 속에 만들어진 이 길은 이 지역과 굳게 접속되어 오가는 보행인과 그 속에서의 이벤트들과 함께 끊임없는 활기를 갖게 되며 그 결과 이 건축은 스스로 작은 도시가 될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 건축의 기능은 건물의 이름이 뜻하는 바대로 2 개의 공연장과 화랑이 주된 것이며, 이를 운영하기 위한 상업시설 그리고 한 채의 주택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하 20m를 파내어 9m 높이와 4.5m 높이의 공 연장 2개를 만들고 1,2층에는 몇 가지 상업시설로 계획하고 3,4층은 내부에서도 연결계단을 갖는 전시장으로, 5,6층은 주택으로 기능을 배치하였다. 300석 규모의 지하공연장은 이 지역의 공연장 실태로 보아 비교적 큰 규모이다. 다양한 형식의 이벤트가 행해지도록 폭12m, 길이24m 직육방체의 실험공간으로 설계되었으나 시공 도중 프로세니움 형식의 발코니 있는 공연장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러한 서로 다른 기능의 복합적 기능들을 크지 않는 규모의 건물에 수용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들은 동시에 다발적으로 이벤트가 벌어질 수 있는 것이어서 자칫하면 서로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각기 다른 레벨의 기능에의 출입을 외부에서 직접 가능하게 하는 오픈된 계단은 이런 점을 해결하기 위한 퍽 유용한 장치가 된다. 이 건축에서도 형태는 없다. 공간과 그를 싸 안는 재료인 콘크리트만 있다. 노출 콘크리트는 참으로 진지한 재료이다. 노출 콘크리트로 설계 하기 위하여는 철저히 계산된 공간과 통제된 디자인 그리고 그 거푸집과 관련한 세밀한 도면이 필수 불가결하다. 이를 시공하기 까지의 과정은 마치 종교의식의 진행과 다를 바 없다. 가구 짜는 듯한 거푸집 제작, 좋은 날씨에 대한 기다림, 레미콘 공장과의 긴밀한 연락, 시내 교통 사정, 축제 같은 레미콘 붓기와 다지기 그리고 가슴 졸이는 기다림-이러한 과정은 쌓다가 싫으면 허물고 다시 쌓는 벽돌과도, 붙이고 걸다가 싫으면 다시 떼는 현대의 공법과는 기본적으로 그 진지함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진지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무채색의 벽체는 스스로는 드러나지 아니하나 그 안에 거하는 모든 이들의 삶을, 그 앞을 지나는 모든 이들의 사위를 그대로 드러내며 돋보이게 한다. 노란 옷을 입은 어린이들의 해맑은 웃음과 젊은이들의 치기와 낭만, 예술인들의 고뇌들을, 그리고 국적 불명의 풍경과 어지러운 네온의 환상까지 이 조그만 벽체는 담아 낼 것이다. ..........그럴 수 만 있다면, 내가 이 건축에서 또 보여준 무능력을 조금은 덮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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