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콘텐츠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학의제 | 鶴儀濟

위 치 경기 의왕시 학의동 672
구 분 신축
용 도 단독주택 
대지면적 3803 m2 지상층수 2
건축면적 276.3 m2 지하층수 -
건폐율 7.27 % 구조 철근콘크리트조
연면적 329.64 m2 용적율 8.67 %
외부마감 외벽-노출콘크리트+알루미늄시트 창호-THK24 투명복층유리 내부마감 바닥-온돌마루 벽/천정-석고보드위비닐페인트
작품설명 1. 들어가는말 - 시대가 낯설은 한옥

전통의 현대화와 시대정신 그리고 우리문화의 정체성을 말하면서, 서양문화의 깊은배경은 뒤로한 채 역사 속에서 진정한 모더니즘 조차 경험하지 못한 우리들에게 다양성과 다의성의 시대라고 무엇이든지 가능하다는 생각은 재고 되어야한다.
설익은 서양문화에 젖어 우리들의 미감과는 어울리기 힘든 어색한 섞임의 문화모습을,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심사숙고 하여야하지 않을까? 모더니즘의 폐해만을 앞세워디지털시대에 발빠른 대응전략으로 이상한 용어들을 통한 낯설게 하기와비껴가기의 차별화 전략이나, 사람들이 알지 못함을 빙자하여 특종기사를 찾는 신문기자의 수법을 동원한 놀램과 충격으로 새로움을 추구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자문을 하지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시대에 우리것임에도 불구하고 한옥은 오히려 낯설은 환경에 놓여있는 것 같은느낌이고, 정신세계의 백미인 종가댁은 스스로 명맥을 유지하기도 쉽지않다.
한옥양식의 형태와 이 시대 삶의 형태가 너무도 달라서 사는이와 건축이 서로에게 부담이되는 형상이다. 이제는 한옥이란 형식만 남고 내용은 사라진 박제된 모습으로 표본실의 청개구리의 처지가 되어있는 양상이다.
건축과삶의 주체인집주인이 잘어우러진 상호간의 현상성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러나 그집의주인이었던 옛날의 선비들의 채취는 간곳이 없어도, 빛 바랜한옥의 골간에는 그들의 숨결이 배어있는 듯하다. 탈골된 서까래의 추녀밑 바위는 무심히 있지만 무언가 할말이있는 듯하다.
나는 이 작업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사항에 대하여 고민하였다. 이 시대 종가댁을 어떻게 이해하여야할것인가? 그리고 그들의 사유의 흔적들이 과연 이시대에도 유효한 가치를 가질 수 있는가? 그리고 유효하다면 이와같은 장소를 이시대, 어떻게 건축화 할 것인가? 다시말하면 종가댁의 정신적내용에 대한 이 시대에 올바른 해석과 현대건축을 통한표현의 방법을 찾아야하는 것이다.

2. 종가와종가댁- 종의 뿌리와 건축의 관계

이 집이 얼마나 오래된 집인지는나도잘모른다. 그러나 지금 남아있는 현판형식의 상량문에 ‘癸亥陰六月十八日鶴儀精舍’라고 써있는 것을보면, 정확히 1863년 아니면 1923이 계해년이 되는 것이다. 이는한옥이 80년 남짓아니면 140년이 되었다는 것이다. 일제 때 많이 축소되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현종손의 조부가 상량문을 짓고 이집을 신축한 것으로보여, 80년이 조금 넘은 소박하지만 북향으로 배치되어있는 모습이나 여러정황이 지조 있는 선비의집이라고생각된다. 그분들의 올바른 가문의 정신세계가 건축표현대상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고형식이며, 사유의 근거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종가댁이란 대종가와 파종가로 나뉘는데, 이곳은 반남박씨의 파종가인 셈이다.
그 연원을 간단히 살펴보면 1세인 박응주(朴應珠)는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그를시조로하여 조선초기 태종시기 6세 손박은 이라는 분이 반남군에 봉해짐으로써 그 이후로 반남박씨가 되었다고 한다. 그후 족보를 최초로 만든자는 선조때 박彌(미) 라는 분으로, 그의 부마로 전해진다. 시조로부터 11세손인 박 紹(소)라는 분이 다섯 자녀를 둔 바, 첫째가 응천, 둘째가 응순, 셋째가 응남, 넷째가 응복, 다섯째가 응인으로 가계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현재 백운산자락 마을에 기거 하시는 분이 셋째 응남의 14세손이며, 시조로부터는 25세손이 되는 88세의 박창서옹께서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가계의 내력을 또렷이 기억하시어 소상히 들려 주셨다. 현 종손은 박紹(소)의 3남인 응남의 자손들로 그의 15세손이 되는셈이다. 응남(應南)은 중종 때대사헌, 도승지를 역임한 분으로 바른말 잘하기로유명했다고 한다. 넷째인 응복(應福)에서는 그 증손자로 조선 성리학의 대가이며 동국 18현의 한 분인 文純公박 세채(南溪) 어른의 가계로 이어지고, 다섯째인 응인(應仁)의 증손자는 사변록으로 유명하며 숙종당시 최고의 지성이고 실학자이며 개혁주의자였던 박세당(西溪) 어른의 가계인것이다.
박세당어른은 2003년 8월 문화관광부에서 생전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이달의문화인물”로 지정된 바도 있다. 그 분들의 직계는 현재 의정부시 장암동의 수락산 자락에 서계선생과 관련된문화사업을하고자 서계문화재단을 설립, 종손인 박찬호 옹과 그의 아들인 박용우 씨가 이사장에 취임한 기사가 2004년 10월 조선일보 제 26065호에 실리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대표적인 인물들을 살펴보면 이조말기의 대표적인 실학자 이자 김홍도, 김정희와 더불어문예3대가라 불리며 허생전과 양반전으로 잘알려진 연암 박지원이있다. 또한 그의 증손자인 박규수는 고종때 최익현과 더불어 척화를 주장하였으며, 구한말에는 갑신정변의 주역인 박영효, 영교형제를 비롯하여 수많은 인재들이 그들의 가문을 빛내었다.
조선시대에 문과급제자 215명, 상신 7명, 대제학 2명, 왕비2명과 조선 후기에 들어 인물을 많이 배출하여 박씨중에서도 벼슬이 가장 화려하다고 적고있다. 한국의 성씨총람에서 밝히고있다.

3. 자연과 인간의 관계, 그 충돌의 현장 - 땅, 대지

옛한옥을 허물고 다시 건축하는 종가댁은, 기존의 건축에 내재된 건축적 사유를 해석하여 건축이 세워질 장소에 대한 의미가 이 시대에 맞도록 번안과정을 거쳐 다시 써야만 했다. 건축에서 가정 먼저 접하는 문제는 장소의 선정인데, 이는 그자체의 가치를 제대로 부여받는 장소적 공간이어야 한다.
이곳은 이미‘蛇頭穴’이라는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의 장소이다. 그러나 그 명당의 장소는 이제부터 새로운 의미의 ‘Now’, ‘Here’의 시간성을 머금고 있는, 어느지점을 넘어선 새로운 가능성의 꿈을 꾸는 먼 미래를 머금은 장소여야 하는 것이다. 비록 오랜시간의 가치를 품어왔던 장소라 할지라도—장소라는 자연은 인간과 건축이 일종의 규정하기 힘든 그 무엇의, 미지의 애매함을 품으면서 서로다른 꿈을 꾸는것들이 서로 공명하기를 바라는 장(場)이기 때문이다.
구축한다는 실체적행위의 첫번째 만남은 자연의 의지와 인간욕망의 충돌현장인 바로땅, 대지이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 있고자 하고, 인간은 자신들의 편리를 위하여 자연을 변형시키고자 하는 욕망과의 충돌”, 즉 부딪침이다. 인간들의 이익과 편리를 위한 자연의 물화(物化)로서, 마르크스(K.Marx)가 말하는 인간의 노동을 통한 차려진 밥상으로서의 장소는 아닌 것이다. 인간들의 오만한 행위의 현장이었던 장소는 상호의존을 위한 상호인정 상태에 두어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
실천의 시작은 인간외의 타자를 이용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을 거두고, 자연의 있는 그대로인 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어느누구도 규정할수 없는, 규정의 대상이 아닌, 그럼에도 인간은 규정되지 않은 대지의 공간에서 건축행위의 생경함을 통해서만 만남을 주선할 수 밖에 없다면 이는 문화의 영역으로 진입하기 위해 타자의 존중으로부터 시작함이 옳을 것이다. 모더니즘의 결과가 부메랑이되어 인간에게 되돌아오는 것을 지금도 우리는 경험하고있지 않은가. 건축의 행위란 인간의 영역과 인간외적인 영역의 조화로 이루어지는 상호결합과 상호침투와 상호간섭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쉽게 규정하기 어려운 영역인것이다. 인간은 더이상 나르시스틱한 자기확대의 착각에서 벗어나 건축외적인 영역, 관리되지않은 외부로서의 자연성의가치에 대해 인간들은 너무도 무지하고 오만한 것은 아닌지에 대하여 진심으로 관심을 가져야할 것이다.

4. 자연과 건축의 관계, 중간자로서의<그대로둠>

“자연의 그대로 있고자 하는 의지와 인간의 자연을 변형 하고자 하는 욕망과의 관계는 현장에서의 충돌뿐이다.”그 충돌 현장의 접점의 장소에서 완충의 역할은 자연, 인간, 건축이 상호 의존의 관계에 있다는 것과 서로가 다른 성격의 둘이 아님을 깨닫는 일이다.
자연과 건축의 관계는 적어도 나에게는 자연의 의지와 인간의 욕망의 완충 공간으로서의 그대로 둠(void가 아닌 being으로서의 인정상태)이다. 그대로둠은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공간이고, 채움은 비워짐을 기다리는 대기공간이다. 이들의 관계는‘자연 그대로의 그대로 둠>비움>비움과채움>채움’등의 관계로서 설명이 가능 할 것이다.
건축에서의 비움과 채움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나에게는 동일한 ‘불이(不二)’개념이다. 형태와 공간역시도 ‘공간이 먼저냐? 형태가 먼저냐?’의 문제가 아니라, 형태가 그려지면 공간이 뒤따르고, 공간이 만들어지면 바로 형태가 따라붙는다. 이 역시도‘不二’이다. 넓은의미로 해석하면 자연과인간, 건축도‘不二’인 것을.
비움과 채움의 문제는 인위적인 관계 설정의 문제로, 그냥 그대로 둠(being) 과 인위적으로 없게 함(void)과 인위적으로 있게함의 의도적인 관계 지음이다. 자연인 대지의 비움(여백)을 위하여 건축한 것인지, 채움(건축)을 위하여 비워두는 것인지의 관계는 어느 한쪽의 중요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호의존과 보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함께 중요하지, 어느 한쪽이 더 중하고 어느 한쪽이 경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건축행위를 한 것과 하지 않은 것 사이의 상호간섭 혹은 상호침투에 의해 신경조직에 바이브레이션을 일으키는 것은 상호작용성에 의하여 나타난다. 만들어진 것과 만들어지지 않은 것의 강렬한 상호작용으로서 비움과 채움의 관계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인식의 대상으로 파악된다. 그것은 비어있음의 넉넉함과 채워지고 발전할 공간간 차이의 파악이 중요한 것이다.
자연과 인간, 건축 간의 상즉상입(inter-fusion)과, 상호침투성(inter-penetration) 에 의한 상호의존성 (inter-dependence) 을 이해한다면, 그리고 이 셋의 긍정적인 관계의 상호작용성( inter-activity)을 원한다면, 그 능동적 행위의 주체인 인간은 당연히 상호 존중성(inter-respectation) 의 자세가 바람직하다는 사고가 자연과 건축의 관계에 인간이 올바르게 개입하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 건축행위의 작은실천의 방법으로 나는‘그냥그대로둠’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5. 경계 없음으로 표현되는 전체- 相卽相入의경지

건축은 전체적인 흐름을 중시한다.
우리의 띄어쓰기가 없는 글이나 우리들의 전통음악의 가락이 가진 공간에서 보이듯이, 그 관계에는 경계가 없어도 흐름에 의하여 전체의 의미가 전달된다. 자연과 인간의 경계나 자연과 건축의 경계역시 구분을 하여도 구분이 되지를 않고, 구분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더 큰 하늘공간에는 경계가 없음이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그 곳에는비움과 채움의 반복과 비움과 비움의 관계와 채움과 채움의 관계가 반복되면서 상호관계를 만들어가며, 장소에서의 인위적인 채움과 인위적인 비움으로서의 외부공간과‘ 그냥 그대로 둠’으로 인하여 더 큰 외부가 어우러지는 모습이 되는 것이다.
건축에서 전체를 이루는 안의 영역과 밖의 영역은 한정과 무한이라는 개념으로 치환할 수도 있다. 안이라는 공간의 한정은 이미 형태라는 또 다른 한정을 낳는 상호한정과 상호침투를 반복하는 양상으로 진행되지만, 자연이라는 무한한 밖의 영역에서 바라보면 건축이란 단지 외부에 의존하며 잠시 후 사라지는 순간과 영원을 함께하는 존재가 아닌가 한다. 그래서 건축의 안과 밖은 둘이 아니고 하나인 것을 인식하고 서로 대화하여야 한다. 이를 무시한 건축의 행위는 인간정신의 자만 혹은 과신과 같은 모더니즘의 병폐를 다시 재현하는, 반복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에 인간의 의도된 것, 즉 정신의 표현의 한계를 인정하고, 때로는 의도한 것과 인간의 영역 밖의 타자에 대한 의도 되지 않은 것에 관심을 기울여 그 둘의 조화로운 결합에 의하여 서서히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즉, 바람과 빛과 그림자, 그리고 향등 등이 인간의 의지와 의도 밖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 이시간과 서로의 상호침투와 상호간섭에 의하여 완성되어지는 것이다. 어쩌면 건축은 건축 외적인 타자들이 존재하는 경계너머에 있는 요소들에 의하여,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자연의 시간성과 함께 이루어지는 예술인지도 모른다.

6. 건축재료- 그 번짐 효과

건축행위의 욕망은 애매한 규정 혹은 실체를 알거나, 규정되지 않은 자연물, 예를들면 바위, 물, 소나무, 공기, 바람 등이나 미가공의 인공물이나 최소한의 가공을 거친 재료들을 사용하여 건축가 자신사유의 세계와 불협화음의 어긋남으로 만나고 싶다는 데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불협화음, 그 어긋남의 틈의 공간이 바로 건축가에게는 정신이라는 사유의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기회이며, 미지의 세계로의 여정과 여지를 남겨놓는 중요한 영역이다. 이미지의 불확실한 충돌의 현장과 영역이 바로 건축가의 신경조직을 예리하게 만드는 트레이너 역할을 하기도하고, 때로는 무기력하게 만드는 칼날과 칼등 같은 존재가 되기도 한다. 그것은 상호침투와 상호간섭 등을 통하여 부딪쳐 터트려짐으로 인하여 허(虛)함, 한(寒)함, 징(徵)함, 적막감 등 언어너머의 번짐의 효과를 나타내는 데 있는 것이다. 가끔 화가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예술적인 것을 만들기 위해 폐품을 수집하고, 요사이는 오히려 폐품을 만들기 위해 예술을 수집하는 경향조차 엿보인다. 그 의도는 오래된 시간을 머금은 물건을 가져다가 날것과 함께 병치함으로써 노리는 재료의 현상성이 아니겠는가?
없는 시간성을 있는 것처럼 만드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텍토닉(tectonic)적인 재료의 사용은 재료의 스킨으로서는 한계가 있다. 재료의 겉은 근본적인 건축의 본질이 해결된 다음의 문제이다. 자연과 연관된 건축에서의 자연의 상태로 방치하기, 허(虛)하면 그냥 가져다 놓아 보강하기, 기둥이나 벽의 한정에 의하여 사물의 위치나 장(場)을 바꾸어 짜고, 어긋나게 고쳐, 서로 공명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상호간의 침투, 대응, 관계를 통하여 서로 관련 짓기를 통한 바이브레이션을 일으키고, 그 번짐의 효과와 장소에 특별한 아우라를 일으키는 일이다. 이는 상호 의존과 상호보완, 상호존중의 관계성에 의한 상호 작용성의 위치에 놓이게 만드는 것이다.

7. 맺는말

금번 마무리한 두 개의 작업은 <학의제>라 명명한 종가 댁과 수도원인 <묵당>이다. <학의제>는 과천 청계산과 연결된 백운산 자락과 백운저수지에 인접한 전원의 장소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인들의 수도원으로 강원도 횡성의 해발 720m 고지에 있는 자연속의 건축 작업 이다. 이 작업을 통하여 나는 자연과 건축의 관계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건축과 자연의 관계는 상호보완의 관계로, 어는 한쪽으로의 치우침 없이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야하는 관계성이 중요하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아울러 자연을 개별로서의 존재의 당위성을 인정하는 것 또한 자연에 대한 인간이 가져야할 기본적인 바람직한 관계가 아닌가 한다. 인간과 건축과의 관계도 역시 건축을 통한 인간의 감성의 퍼짐과 번짐이 있어야 하고, 인간의 지적 감수성을 자극 하는 요소가 필요한 것이다.
그 상호보완의 관계는 서로의 번짐과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상즉상입(相卽相入)의 관계를 통한 떨림이 일어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건축과 자연의 관계 지음에 있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번짐과 퍼짐의 바이브레이션이 일어나게 하는 건축행위를 통하여 일정수준 이상의 깊이와 감동을 획득하는 것이 진정한 건축이 아닌가 한다.

글 / 배병길 (배병길건축연구소)



■ 크리틱

학의제와 건축단상
김미상 | 한양대학교 건축대학원

<학의제>의 터는 청계산, 백운산, 모락산 등을 배경으로 하는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은 임영대군의 묘와 사당 등을 비롯, 대체로 조선 초기부터 시작되는 역사적 이야기와 사적, 그리고 자취들을 꽤 많이 품고 있고, 집성촌의 성격이 강한 마을들로 둘러싸여 있다. 대상이 되는 건물은 반남박씨의 종갓집 터에 새로이 지은 것으로, 종가의 뿌리를 유지하고 지키려는 정신이 전제되는 건물이다. 그러나 건축가 배병길의 <학의제>는 모더니즘 형식의 건축을 떠오르게 하는 건물로서 건축적인 논의에 앞서 양(洋)으로 대변되는 공간적인 차원, 그리고 과거와 현재가 갈등과 고민으로 나타나는 시간적인 차원의 사화학적, 철학적 문제가 전제된다.

입구는 도로로부터 접근이 용이하도록 서쪽으로 나 있으며, 경계에 들어서면 건물은 낮은 담장으로써 사람과 차량을 각기 유도하는 두 개의 길로 나뉘도록 구성되어 있다. 대문 옆의 차고는 사다리꼴의 공간이지만 착시 현상으로 인해 입구에서 보면 평면은 거의 온전한 사각형처럼 느껴져, 분석자의 입장으로서는 설계 의도를 헤아리며 심각하고 예민해진다.

건물의 전반적인 평면 구조는 비교적 단순하다고 할 수 있다. 서쪽에 주방과 작은 침실, 중앙에는 거실, 그리고 두 개의 층을 터서 만든 빈 공간을 낀 동편 2층에 서재, 남쪽엔 야산을 바라보며 돌출된 별도의 1층 방 또는 독립채가 주건물로부터 독립되어 배치되고 있다. 공간들은 복도와 통로로써 연결되고 있고, 특히 남쪽의 복도는 평면상 주축을 구성하여 각 공간이 매달리는 데 주요한 가이드라인이 된다. 평면에서 볼때 각 실은 이러한 수평축을 따라 일렬 배치가 되어, 건물 내부 및 건물 외부에 달라붙은 통로들은 일종의 마루로써 연결되고 소통된다. 연결로의 내외부는 재료의 차이, 즉 보도블록과 마루로써 변별되고 차별화된다.

<학의제>를 방문하는 사람은 이곳이 아주 긴 담장들로 공간이 크게 구획되었음을 보고 놀랄 수도 있을 것이다. 배치상 전통적인‘ㅡ’자 혹은 ‘ㄱ’자 한옥 평면에 흡사한 구성을 가진 이 주택은, 내외의 공간에서 고려할 때 전통 한옥과는 다른 체계의 배치를 하고 있다. ‘ㅁ’자 한옥을 제외한 전통 한옥에서는 방이 뒤로 물러앉고 툇마루 등이 앞으로 배치되어 외부의 마당을 비롯한 바깥을 내다보는 구조라고 한다면, 건축가 배병길은 안마당을 끼고 바라보는 내부의 마당을 건물 내에 두고 있다. 기능상, 미학적 체계상 같은 축을 따르면서 이탈하는 이러한 방식은 현대 한국 건축가들의 작품에서 자주 발견되는 연출 형식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전수된 기본 원칙이나 연출 방법론 등은 수호하되, 그것을 겹치거나 교차시키고 충돌시킴으로 일차적으로 중의적 의미, 더 나아가 그것을 더 배가시켜 다의적 의미를 산출하고 적용하여 결과물을 배출하는 방식은 어느새 우리의 주된 흐름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데, 배병길 역시 이러한 배경을 거부하지 않는 듯하다.

뿐만아니라 형태, 공간, 재료, 사상 등 여러 측면에서 이미 한국적 전통성, 서양 모더니즘의 전통성을 탈출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개인적인 판단으로 볼 때 작가 자신의 여정을 반영한다면 이런 작품은 역사적(逆史的)이기도 하다. 이전의 요코하마 빌딩, 국제 갤러리, 현대갤러리 등이 전위적 흐름에 몸을 담은 것들이라면, 요즘에선 보이고 있는 일산 은둔의 집, 묵당 수도원 계획안 등은 오히려 시간을 거슬러 올라 정통의 모던 건축을 참조하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형태·기능적인 측면에서 판단되고 표현되는 모더니즘의 전통, 즉 영혼과 기능, 리얼리티의 추구와 의미의 말살과 같은 이분법적 태도를 그의 건축에서 찾을 수 없다.

그의 작품을 토대로 몇 가지 측면에서 예를 들어 보자. 20세기의 모더니즘 건축계를 지배한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은 빛 아래 숙련되고, 정확하며 장엄하게 조합되는 매스의 놀이이다’라는 금언과 ‘건축적 산책’의 원칙은, 유사한 요소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배병길의 작품에서 역사 속 참조의 사항이 될 뿐 이전의 전 세계 건축가들이 추구했듯이 감성적, 미학적 경험으로 요약되는 데 그치고 있지는 않다. 그의 <학의제>는 외관상 아주 견고하고 장대한 스케일의 ‘ㅡ’자형 직육면체 덩어리로 인식된다. 조형적 측면에서 관찰한다면 동편의 마당 계단과 상부의 복도가 만나는 지점은 20세기 초 르 코르뷔지에 등이 모방하고 채용하였던 기선의 발코니를 연상시키는 듯한 형태로 건물의 외측으로 돌출되어, 가소적 특징을 한층 강조하고 있다. 앞마당의 개울 옆 출입구 역시 모더니즘의 건축가들이 선호하던 조각적 형태의 문으로 구성되었고, 후원의 별채는 독립가옥처럼 구성되었다.

그러나 입구 부분을 비롯하여 남쪽 외관에 붙은 다양한 크기의 각 요소, 특히 입면에 짧은 수평선으로 드러나는 요소들은 매스의 순수성을 해체시켜 버리고 있으며 다양한 크기와 성격의 마당을 구성하는 담이자 외부 벽들 역시 보는 이로 하여금 명확한 형태의 파악을 어렵게 방해하기도 한다. 하부의 표피는 기본적으로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되었고 상부의 표피는 알루미늄 시트로 마감되어 상하가 변별되었다. 이것은 구조나 축조로부터 이끌어내는 변별이 아닌 시각적 차별화에 더 가깝다. 개구부가 많아 비교적 개방적으로 감지되는 하부는 유리를 도입하여 전후의 공간을 투명하게 보여 주고, 앞뒤 및 그 사이의 중간 공간이 시각적으로 관통되도록 연결시키고, 허(虛)의 공간처럼 보임으로써, 상부의 매스를 강조하는 효과를 가져다주고 있다. 반면에 알루미늄 시트로 마감된 정면 상부는 그 크기와 위치, 폐쇄적 형태로 인하여 강한 매스로 인식되긴 하지만, 좁은 수직적 패널들을 붙여 놓아 통일성이나 균질성을 지고의 목표로 하는 모더니스트의 것과는 사뭇 다른 혼합적이고 혼성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알루미늄 판이 보여주는 희미한 광택은 매스의 형태적 특성을 어느 정도 감소시키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요소의 변별과 전통적인 건축 사상 혹은 방법론에 대한 의도적인 위반은 재료를 통해서도 이루어지고 있음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건물 내의 실을 제외한 개방적 폐쇄적공간은 크게 두 가지 종류의 연출로 구성되며 각각의 공간에 따라 고유한 변법이 적용되고 있다. 우선 홀과 거실 사이에 위치하는 건물 내의 안마당, 그리고 벽을 타고 올라가도록 배치된 계단이 있는 동쪽의 기념비적인 공간은 관조와 이동을 전제로 한다. 이 공간들은 유용성이나 미학적 측면보다는 정신적인 수양과 사색을 위한 심리적 측면에서 더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므로 각 마당을 둘러쳐 있는 마루나 통로는 의식적(儀式的) 역할을 띠는 선적(禪的)이자 선적(線的인)인 공간이며, 최후의 지점인 거실과 접한 마당과 외부 마당은 비록 3차원적인 육면체의 허(虛) 또는 사각형 평면을 하고 있는 구체적 면적과 체적의 공간이 긴하되, 목표가 되는 점적인 성격을 띠게 되며 시각을 비롯한 감각의 수직적 상승과 경험을 유도한다. 이러한 구성은 앞에도 잠시 언급 했듯이 전통 한국의 ‘ㅡ’자형 또는 ’ㄱ’자형 공간과 방의 배치에서 볼 수 있는 외부지향적인 성격의 것이 아닌 구심적이고 내적 성찰을 일깨우는 내성적(內省的) 공간을 이루고 있다. 결과적으로 평면은 단순한 홑겹의 선이 아닌, 면이 되고 깊이 있는 공간화로 이어지고 있어서 공간과 구축 요소들로써 이루어지는 형식과 내용은 기본적인 몇 가지 변주로써 급격하게 차원이 몇 단계 바뀌곤 한다.

울타리로 둘러싸는 행위는 경계를 형성하고 각기 다른 세계를 구현하게 하며 폐쇄성이 필수적인 목표가 되고 있다. 열려진 단위 개방 공간의 느낌을 보장하기 위해 폐쇄성을 추구하며, 이 폐쇄성은 연결로를 둠으로써 극소의 부분만을 개방하며 보장된다. 뿐만아니라 이러한 폐쇄성은 시각적 관점에서 볼 때 주변과 분리되고 조절할 수 있는 필수 조건이 된다. <학의제>에서는 벽, 담, 창의 개념이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되었다. 막힌 것 같지만 열리고, 열린 공간이지만 경계가 구획되어 구역을 닫았고, 3차원적 공간 조건에서 본다면 다시 열리는 연쇄적 연출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물리적인 구획과 어울려 심리적인 구획과 개방 역시 평면에서 보인다. <학의제>에서 통로는 공간을 연결하고 둘러싸 공간을 규정하고 있는 반면, 담 혹은 벽은 그에 그치지 않는다. 담은 경계를 이루며 곳곳에서 바위를 가로질러 달린다. 담으로 인한 경계선은 무차별적으로 달려가지만 그로 인해 이분된 바위는 심리적인 공간의 연장을 연상시킨다. 반면 개울 변의 큰 나무는 구획을 중단한 벽선의 방향과 정확히 일치하여 색다른 연출을 보여주고 있다. 이 나무는 마침표인가, 개울 너머 외부로 연장을 위한 스타카토인가?

현대의 우리가 언급하는 건축은 연속적인 전통 건축의 재현과 건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보다는 새로운 해석을 위하여, 형태는 새로우나 의미와 내용은 전통적임을 추구하곤 한다. 서양으로부터 전래된 현대의 건축은 그 성격상 보편성을 추구하므로 각 용도나 의도에 따른 유형을 제시하고 있지 않아, 우리로서는 한층 더 판단이 어렵고 새로운 질서를 마련하거나 다수가 공감하는 데에 각별한 노력과 경험이 필요하다. 이러한 면에서 배병길은 구축적 문제나 정통 미학 체계에 한정되지 않고 토착적 컨텍스트와 문화 요소를 심층구조 속에서 찾음으로써 사회학적이고 문화주의자적인 태도를 표방하기 시작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순수하게 사변적이든 개념적이든, 아직도 미완성의 물리적 구현이 되었든, 이전의 건축가들의 궤적이나 배병길 자신의 의도에 거슬러 순명적으로 따라야 했던 정신과 감성의 대결을 의식하고 그것을 완화시켜 조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일차적으로 그는 예술과 기능, 혹은 유용성의 이분법 중 대부분 예술 쪽에 승부를 걸고 있을 것이다. 뿐만아니라 그의 기준으로 판단하면 이러한 항목을 정신적인 세계와 연결지음으로써 확고한 건축가의 자세를 유지하려고 하고 있다. 그는 예술로서의 건축, 진실로 자신이 경험하고 소화시킨 정신과 문화 세계가 반영된 건물의 생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더 소화하고 탐구해야 할 부분은 아직도 있어 보인다. 학의동 및 그 주변은 우리나라의 많은 장소가 그렇듯이 그 성격이 변해 왔다. 전통적으로 농촌이었던 곳이 제방을 구축함으로 논농사가 강화되고, 제한된 차원에서나마 낚시 등 어업이 도입되었으며, 최근엔 백운호를 중심으로 서비스업과 화훼 산업이 발달된 장소가 되었다. 애초엔 생존을 위한 장소였던 곳이 최근엔 레저와 여흥을 위한 곳으로 바뀌었다. 이런 주변 환경에서 <학의제>의 성격 또한 모호해지고 있다. 애초의 농경 사회적 대가족 제도 하의 종갓집에서 퇴락한 건축물마저 없어지고 새로운 형태와 체계의 건물로서 대체되게 되었다. 장소의 측면에서 볼때 심각한 정체성 상실이란 문제에 접하게 되었으며, 예부터 거기(Da-) 있었던 거기가 없게 되어 존재(Da-sein : Being) 자체가 사라져, 존재론적 측면에서 심각한 타격이 있게 되었다. 과거에 자리하고 있던 건물 및 주변의 존재들은 사라져 신화화 되거나 단지 기억속에 입력됨으로 말미암아 의미화의 세계에 편입되었을 뿐이다. <학의제> 터의 건물 자체는 어떤가? 그것은 대규모 종갓집의 면모를 유지하기 위하여 특정한 규모와 공간의 연출이 이루어졌어야만 했을 것이고, 특정한 공간은 관습적인 용도를 위하여 아직도 할애해야만 할 요소일 것이다. 그러나 사랑방이나 정자와 같은 성격을 지닌 공간이 감성적이고 미학적인 필요만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혹은 경제, 필요성, 효율성 등의 요소에 대한 확고한 답을 줄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단순히 건축적 이상이나 개인의 욕망에 부응하는 것이 아닐까?
건조 환경의 주체로서 모든 컨텍스트에 잘 적응되고 모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지도 닫기